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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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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카 시대는 6세기부터 8세기 초(710년)까지 일본의 역사 시기로, 현재의 나라현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천황이 통치하며 불교 문화가 발전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야마토 정권이 규슈와 혼슈의 씨족들을 통제하고,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 행정 체제를 구축했다. 불교가 백제를 통해 전래되어 쇼토쿠 태자의 섭정 아래 십칠조 헌법 제정, 호류지 건립 등 불교 문화가 융성했으며, 중국, 신라, 백제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세기 후반에는 백제 부흥 지원 실패와 신라의 압박으로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 시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었다. 다이호 율령 반포와 헤이조쿄 천도로 아스카 시대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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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호 (701년 이전)
일본 (701년 이후)
일반 명칭일본
존속 기간538년 ~ 710년
수도아스카 (694년까지)
후지와라쿄 (694년 ~ 710년)
공용어고대 일본어
종교신토
불교
일반 언어고대 일본어
중세 중국어
통화후혼센
[[야마토 왕권]]의 일본
야마토 왕권의 일본
[[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
[[호류지]] 오층탑
호류지 오층탑
정치
정치 체제봉건제 군주제
통치자오키미 (천황)
주요 지도자긴메이 천황 (539/540–571)
겐메이 천황 (707–710)
대표오오미 (소가 가문)
주요 대표소가노 이나메 (538/552–570)
소가노 에미시 (626–645)
역사적 사건
주요 사건불교의 도입 (538년)
수도를 나라로 이전 (710년)
주요 사건중국에 사절 파견 (607년)
주요 사건잇시 사건 (645년 7월 10일)
주요 사건다이카 개신 (645년)
주요 사건진신의 난 (672년)
주요 사건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공포 (689년)
주요 사건다이호 율령 제정 (701–718년)

2. 어원

'아스카'라는 이름은 현재의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촌근방에 해당하는' 아스카'에 궁전과 도읍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아스카 시대"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일본 미술과 건축의 한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미술 학자 세키노 다다시오카쿠라 덴신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세키노는 다이카 개신까지를, 오카쿠라는 헤이조쿄 천도까지를 아스카 시대로 하였다. 일본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오카쿠라 안을 채택하고 있지만, 미술사나 건축사 등에서는 세키노 안을 사용하며 다이카 개신 이후를 하쿠호 시대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3. 시기별 개요

6세기 아스카 시대야마토 시대의 하위 시대로, 일본사에서 일본 천황이 현재의 나라현에서 비교적 분쟁 없이 통치한 최초의 시기이며, 당시에는 야마토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분 시대의 후반기에 규슈혼슈의 씨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씨족 수장들에게 일부 세습적인 직함을 수여했다. 야마토의 이름은 야마토 통치자들이 다른 씨족을 억압하고 농지를 확보하면서 모든 일본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국 모델(중국어 채택 포함)을 기반으로 하여 중앙 행정부와 종속적인 씨족 수장이 참석하는 황실을 개발했지만, 영구적인 수도는 없었다. 7세기 중반까지 농지는 중앙 정책의 대상이 되는 상당한 공공영역으로 성장했다. 시스템의 기본 행정 단위는 군이었으며, 사회는 직업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부였고, 다른 사람들은 어부, 직공, 도공, 장인, 갑옷 제작자, 의례 전문가였다.[1]

3. 1. 배경

6세기 중반, 백제성왕이 석가불상과 경론 등을 조정에 보내면서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다.[24]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자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했다. 쇼토쿠 태자소가씨 편에 서서 정미의 난에서 모노노베씨를 멸망시켰다.[24]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 씨가 대신(大臣)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588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호코지(法興寺)를 아스카에 세우기 시작했다.[25]

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를 시켜 스슌 천황암살하고, 스이코 천황을 옹립했다. 우마야도 황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가 되어 섭정이 되었다.[26]

야마토 시대의 하위 시대인 6세기 아스카 시대일본 천황이 현재의 나라현에서 비교적 분쟁 없이 통치한 최초의 시기였으며, 당시에는 야마토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야마토 조정은 고분 시대 후반기에 규슈혼슈의 씨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씨족 수장들에게 세습적인 직함을 수여했다. 야마토라는 이름은 야마토 통치자들이 다른 씨족을 억압하고 농지를 확보하면서 모든 일본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국의 제도를 본따 중앙 행정부와 종속적인 씨족 수장이 참석하는 황실을 개발했지만, 영구적인 수도는 없었다. 7세기 중반까지 농지는 중앙 정책의 대상이 되는 상당한 공공영역으로 성장했다. 시스템의 기본 행정 단위는 군이었으며, 사회는 직업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부였고, 다른 사람들은 어부, 직공, 도공, 장인, 갑옷 제작자, 의례 전문가였다.[1]

535년 (안칸 천황 2년)에는 전국에 둔전(미야케)이 다수 설치되었고, 540년 (긴메이 천황 원년)에는 진인, 한인의 호적이 만들어졌다.[1]

3. 2. 스이코 조정(593년 ~ 628년)

스이코 천황아스카쿄(飛鳥京)의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하여 궁도가 아스카로 옮겨졌다.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27] 스이코 천황은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593년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592년에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불교가 황실에 전래되었다.[29]

603년에는 관위12계를 제정(604년)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는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冠)을 수여하였다.[28] 쇼토쿠 태자604년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견수사로 파견되었고 당시 쇼토쿠 태자는 동쪽의 천자로서 수나라에 안부를 물었다. 600년에는 야마토 조정이 478년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일본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7세기에 여섯 차례에 걸쳐 사절, 승려, 학생들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일부는 20년 이상 머물렀고, 귀국한 많은 사람들이 저명한 개혁가가 되었다.[1]

620년에는, 쇼토쿠 태자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덴노키(天皇記), 고쿠키(国記) 등을 편찬했다. 621년 쇼토쿠 태자가 사망하고, 626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사망하고, 628년에는 스이코 천황이 사망하였다.

일본에서 제작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가장 오래된 불상인 아스카 사의 대불. 서기 609년 제작되었으며, 이 불상은 한국 이민자의 아들인 구라쓰쿠리노 도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587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조카를 천황으로 옹립하고, 나중에는 그를 암살하고 스이코 천황 (재위 593-628)으로 교체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8명의 여성 천황 중 첫 번째인 스이코 천황은 때때로 우마코와 섭정인 쇼토쿠 태자 (574-622)의 허수아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권력을 행사했으며, 쇼토쿠 태자의 역할은 종종 전설적인 수준으로 과장되기도 한다.

593년 쇼토쿠 태자스이코 천황의 섭정으로 임명되어 소가씨와 함께 불교를 장려했다. 쇼토쿠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중국 문학에 정통했다. 그는 군주의 통치는 최고 권력의 의지에 따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천명을 포함하여 유교적 원칙의 영향을 받았다. 쇼토쿠의 지시에 따라 유교적 위계질서와 예절 모델이 채택되었으며, 그의 17조 헌법은 혼란스러운 사회에 유교적 방식으로 조화를 가져오는 방법을 제시했다.

또한 쇼토쿠는 중국 역법을 채택하고, 무역로 시스템 (전술한 "고키시치도")을 개발하고, 수많은 일본의 불교 사찰을 건설하고, 궁정 연대기를 편찬하고, 중국에 학생들을 보내 불교와 유교를 공부하게 했다.[1]

607년 쇼토쿠 태자가 이카루가에 불교 사찰 호류지를 건립했다.

호류지 금당 (서원 가람)


607년 (스이코 천황 15년), 오노노 이모코 등을 수에 견수사로 파견하여, 수의 황제에게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별고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일출처천자치서일몰처천자무양운운")의 상표문(국서)을 보낸다. 유학생·유학승을 수에 유학시켜 수의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국가의 정치·문화의 향상에 힘썼다.

중국인들이 크게 불쾌하게 여긴 쇼토쿠는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고 적힌 공식 서신을 보내 중국 황제와 동등함을 추구했다. 쇼토쿠의 과감한 행보가 선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5세기에 중국과 그러한 관계를 받아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종속적인"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그 결과, 이 시대의 일본은 중국 왕조로부터 어떠한 칭호도 받지 않았지만, 공물을 보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지위나 계급은 왕들이 칭호를 받았던 이전 시대보다 격하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느슨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뛰어난 문화적, 지적 관계를 수립했다.[3][4]

국조제(國造制)는 늦어도 스이코 조정 즈음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국조(國造)란 왕권에 복속한 각지의 유력호족에게 부여한 일종의 호칭으로, 야마토 정권의 지방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3. 3. 조메이・고교쿠 조정(629년~645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스이코 천황이 사망한 후, 소가노 에미시와 그의 아들 소가노 이루카의 권력 남용이 두드러졌다. 스이코 천황이 사망한 후, 유력한 치천하대왕위 계승 후보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대형왕과 다무라 황자였다. 소가노 에미시스이코 천황의 유언을 바탕으로 다무라 황자를 조메이 천황으로 옹립하였다. 이 때 같은 소가씨인 소가노 사카이베노 마리세는 야마시로대형왕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가노 에미시에 의해 제거되었다. 641년 조메이 천황이 사망한 후에는 황후였던 다카라 황녀가 고교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소가노 에미시가 스스로 국정을 집행하고 보라색 관을 착용하였으며, 643년에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대형왕 일족을 몰살시키는 등 소가씨의 전횡이 심해졌다.

645년 음력 6월 12일 (양력 7월 10일), 나카노오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와 모의하여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소가노 이루카고교쿠 천황 앞에서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을사의 변)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소가노 이루카가 살해당한 다음 날 자결하였다. 그 다음날 고교쿠 천황의 양위에 따라 고교쿠 천황의 동생을 고토쿠 천황으로 옹립하고, 나카노오에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일본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하고 개혁을 실행했다.(→다이카 개신) 또한 아리마 황자와 같이 자신과 대립하는 유력 세력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제거해 나갔다.

3. 4. 고토쿠 조정(645년~654년)

을사의 변 이후 고토쿠 천황이 즉위하여 일본 최초의 연호다이카를 제정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다(다이카 개신).[30] 일본서기에 따르면, 645년(다이카 원년) 12월 도읍을 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나니와 궁)으로 옮겼고,[30] 이듬해 646년 (다이카 2년) 정월에는 개신의 조를 선포하여 정치 체제 개혁을 시작하였다.[30] 당시까지 소가씨 대신 1명뿐이던 중앙 관제를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의 3대신 체제로 개편하고,[30] 국사를 통해 호적과 전답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30] 649년 (다이카 5년) 무렵 지방 편제를 고오리(評, 평)에 기반한 것으로 바꾸었다.[30] 650년 (하쿠치 원년) 2월 15일, 아나토국(훗날 나가토국)에서 하쿠치(白雉)라는 연호를 올리자 이를 수용하고 연호를 바꾸었다.[30]

645년 (고교쿠 천황 4년)의 을사의 변에서 나카노오에 황자·나카토미노 카마타리 등이 궁중(아스카 이타부키 궁)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고, 소가노 에미시를 자결하게 하여 반세기나 이어진 소가씨의 체제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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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이미지''': 7세기의 구리 富本銭/''후혼센''일본어 주화, 아스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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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Portrait_of_Fujiwara_no_Kamatari_by_Shimamura_Shunmei_(1853-1896),_1892_World%27s_Columbian_Exposition,_ivory_-_Tokyo_National_Museum_-_DSC05583.JPG|thumb|255px|상아 조각 후지와라노 카마타리(宮彫師 시마무라 슌메이 작, 1892년). 도쿄 국립 박물관

3. 5. 사이메이 조정 (655년 ~ 661년)

고토쿠 천황 사후,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으로 다시 즉위하였으나, 실권은 을사의 변 이후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인 나카노오에 황자(훗날의 덴지 천황)가 쥐고 있었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660년 백제신라· 연합군에게 패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복신·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운동 세력은 당시 왜 조정에 체류하고 있던 옛 백제의 왕자 풍장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3. 6. 덴지 조정(661년~672년)

661년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죽은 뒤, 나카노오에 황자(나카노오에노 황자)는 황태자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나 즉위하지 않고 칭제(稱制)[32] 형식으로 국정을 맡아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33] 663년 백강 전투(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34]

다이카 개신을 주도한 덴지 천황


백강 전투 이후 일본 지배층은 신라의 침략을 우려하여 방위시설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664년 쓰쿠시국에 다자이후를 지키는 미즈키(水城)를 만들고, 쓰시마섬, 오키 제도, 쓰쿠시 등 한반도 방면에 사키모리와 봉화를 설치했다.[34] 666년에는 일본 내 백제인 2,000여 명을 아즈마국(東國)으로 옮겨 동방 방어를 담당하게 하고 방위시설을 정비했다. 667년 도성을 방어에 유리한 오미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로 옮겼다. 그 밖에 야마토에 타카야스성(高安城)이, 사누키국에 야시마성(屋島城)이, 쓰시마에 가네다성이 축성되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668년 칭제를 그만두고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670년 전국에 호적(경오년적)을 만들어 국민의 수를 파악하고, 아즈마국에 목책을 정비하였다. 덴지 천황은 671년 급사하였으나, 사인은 전해지지 않아 여러 설이 있다.

오미 율령은 덴지 천황의 궁궐이 있던 지방의 이름을 따서 668년경에 완성되었다.

3. 7. 덴무・지토 조정

672년 덴지 천황이 사망하자 덴지 천황의 동생인 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 후의 덴무 천황)와 아들인 오토모 황자(大友皇子, 메이지 시대고분 천황으로 추숭됨) 사이에 진신의 난이 일어났다. 오오아마 황자가 승리하여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덴무 천황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정비에 힘썼다. 672년 말에 궁을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로 옮겼다. 관인등용법을 폐지하여 변방의 호족 및 백성의 중앙정부 진출 기회를 열었고, 귀족·사찰의 토지를 반환받았다. 681년에는 율령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686년에 덴무 천황이 사망하고, 황후인 지토 천황이 황위를 이었다. 689년에는 전 22권으로 구성된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이 제정되어 반포되었다. 690년에는 경인년적이 만들어져 육년일조의 조적의 출발점이 됐다. 692년에는 기나이에 반전대부(班田大夫)를 파견, 공지공민제를 기초로 한 반전수수법을 실시했다. 694년에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인 후지와라쿄로 도읍을 옮겼다.

지토 천황. 삼영사『어역대 백이십일 천황 어존영』, 1894년.


지토 천황의 사후에는 몬무 천황이 뒤를 이었다. 700년부터 율조를 찬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701년다이호 율령이 반포되었다. 이로써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귀족·관료에 의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고, 국민의 이름이 정부에 기재되었다. 일본사학계에서는 이로써 일단의 고대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중앙 행정 조직은 태정관과 신기관에 의한 이관 팔성제가 채택되었고, 지방 행정 조직은 국 제도·군 제도·리 제도가 채택되었다.

몬무 천황 사후, 어머니인 겐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710년헤이조쿄천도했다.

4. 문화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발달한 아스카 문화는 스이코 천황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나타난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이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면서, 백제에서 온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들이 일본 사찰 건축에 참여했다.[35] 유교와 도교 등 다양한 외래 학문과 사상이 유입되어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다. 백제 유학자 왕인은 아스카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36][37]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로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은 호코지를 건설했다.[25] 고구려 승려 혜자와 백제 승려 혜총은 호코지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다.[38] 이들은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초청하고 다양한 서적을 수입하여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39]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강독한 것은 혜자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등을 만드는 데는 혜총 대사가 역할을 했다. 호류지의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새로운 종교 교리가 소개되었다.[35] 긴메이 천황 시기 소 씨 가문은 불교와 중국 유교에 기반한 정부 및 문화 모델 채택을 추진했다. 그러나 나카토미 씨와 모노노베 씨 등은 신토 의식을 담당하며 불교의 영향에 저항했다. 소 씨와 나카토미 씨, 모노노베 씨 간의 갈등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다이카 개신에서는 장례 간소화 칙령을 통해 대규모 고분 (고분군) 건설을 금지하고, 고분의 크기와 모양을 계급별로 규제했다.[1] 이후 고분들은 작아졌지만 정교한 벽화가 특징이며, 다카마쓰즈카 고분과 기토라 고분이 대표적이다.

일본 황실과 엘리트 계층은 불교 신앙 확산으로 고분 묘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나 평민과 변두리 지역 엘리트들은 7세기 후반까지 고분을 사용했으며, 이후에도 단순하지만 독특한 무덤이 계속 사용되었다.[1]

675년 텐무 천황은 불교의 영향으로 가축 사용과 일부 야생 동물(말, 소, 개, 원숭이, 새)의 소비를 금지했다.[12] 이 금지령은 헤이안 시대에 종료되었으며, 사슴과 멧돼지는 금지 대상이 아니었다.[13]

용머리 모양의 주전자, 페가수스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도금, 아스카 시대, 7세기, 전 호류지 사찰 보물, 도쿄 국립 박물관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청동판, 서기 698년 제작, 하세데라 사찰, 나라현 사쿠라이시


도교 또한 아스카 시대에 전래되었다. 이 시대 군주의 묘가 팔각형인 것과 기토라 고분과 다카마쓰즈카 고분에 그려진 천체도는 도교의 우주관을 반영한다.

도교 신앙은 결국 신토와 불교와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의례를 확립했다. 음양도/陰陽道일본어는 일종의 일본 풍수지리와 우주론으로, 이러한 종교 혼합의 결과 중 하나이다. 아스카 시대는 종교적 신념을 둘러싼 씨족 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수입된 종교는 일본 고유의 민간 신앙과 융합되었다.

4. 1. 아스카 문화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발달한 아스카 문화는 스이코 천황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나타난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이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면서, 백제에서 온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들이 일본 사찰 건축에 참여했다.[35] 유교와 도교 등 다양한 외래 학문과 사상이 유입되어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다. 백제 유학자 왕인은 아스카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36][37]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로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은 호코지를 건설했다.[25] 고구려 승려 혜자와 백제 승려 혜총은 호코지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다.[38] 이들은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초청하고 다양한 서적을 수입하여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39]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강독한 것은 혜자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등을 만드는 데는 혜총 대사가 역할을 했다. 호류지의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새로운 종교 교리가 소개되었다.[35] 긴메이 천황 시기 소 씨 가문은 불교와 중국 유교에 기반한 정부 및 문화 모델 채택을 추진했다. 그러나 나카토미 씨와 모노노베 씨 등은 신토 의식을 담당하며 불교의 영향에 저항했다. 소 씨와 나카토미 씨, 모노노베 씨 간의 갈등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다이카 개신에서는 장례 간소화 칙령을 통해 대규모 고분 (고분군) 건설을 금지하고, 고분의 크기와 모양을 계급별로 규제했다.[1] 이후 고분들은 작아졌지만 정교한 벽화가 특징이며, 다카마쓰즈카 고분과 기토라 고분이 대표적이다.

일본 황실과 엘리트 계층은 불교 신앙 확산으로 고분 묘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나 평민과 변두리 지역 엘리트들은 7세기 후반까지 고분을 사용했으며, 이후에도 단순하지만 독특한 무덤이 계속 사용되었다.[1]

675년 텐무 천황은 불교의 영향으로 가축 사용과 일부 야생 동물(말, 소, 개, 원숭이, 새)의 소비를 금지했다.[12] 이 금지령은 헤이안 시대에 종료되었으며, 사슴과 멧돼지는 금지 대상이 아니었다.[13]

7세기에 지어진 호류지의 목조 건물들은 중국과 서아시아 국가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호류지의 기둥은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기둥의 엔타시스와 유사하다. 은 인도식 사리탑 구조인 ''스투파''에서 변형된 것이다. 5세기에 지어진 다카마쓰즈카 고분과 키토라 고분의 벽화는 당나라고구려 벽화의 영향을 보여준다.[14][15]

이 시대의 일본 불교 조각은 중국 육조 시대 양식을 따랐으며, 구라쓰쿠리노 토리의 이름을 따서 토리 양식이라고도 불린다.[16] 아몬드 모양의 눈과 대칭적인 옷 주름, "아르카익 스마일" 미소가 특징이다. 호류지의 구다라 관음이 대표적인 불교 조각이다.

4. 2. 하쿠호 문화

다이카 개신(646년)부터 710년 수도가 나라로 옮겨질 때까지의 시기는 하쿠호 문화라고 불린다. 8세기 후반에는 무사에서 천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많은 노래와 시를 짓고 공연했다. 이 시의 가장 오래된 컬렉션은 만요슈로 알려져 있다.[17] 여기에는 누카타 공주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와 같은 몇몇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와카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시로 등장했다. 와카 시의 범주 내에서 더 인기 있는 형태 중 하나는 단카로 알려져 있다. 단카는 5/7/5/7/7의 음절 패턴으로 5행에 걸쳐 총 31개의 일본어 음절(모라)로 구성된다.[17]

5. 대외 관계

중국 문화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이 설립되기 전에 한국의 삼국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 사절단 파견은 계속되었지만, 초기 고분 시대에 존재했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향으로 인한 일본의 변혁은 쇠퇴했다.[1] 한편, 서로 갈등을 빚는 한반도의 국가들은 일본의 중립 또는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외교 사절단을 자주 파견했다.[9] 궁극적으로 이는 일본의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이 증가함에 따라 백제에 가장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10] 많은 장인과 숙련된 기술자들을 포함한 사람들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595년에 도착한 고구려혜자와 백제의 혜총 두 명의 고승이 포함되었다.[11] 관륵 또한 백제에서 왔으며, 쇼토쿠 태자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일본이 백제와 동맹을 맺자 고구려 승려들은 일본을 떠났다.

600년부터 659년까지 일본은 당나라에 일곱 명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문서를 기반으로 법을 제정하던 다음 32년 동안은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지만 신라에 11명의 사절을 보냈으며, 일본서기에는 덴무 천황지토 천황 재위 기간 동안 신라가 일본에 17번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65년에 건설이 시작된 오노성 유적의 돌 기반 섹션


7세기 후반 아스카 시대 다카마쓰즈카 고분 서쪽 벽에서 찍은 여인들의 벽화


야마토 시대백제의 지배 계급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야마토 조정은 660–663년에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백제를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백강 전투 참조).

5. 1. 신라와의 관계

중국 문화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이 설립되기 전에 한국의 삼국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 사절단 파견은 계속되었지만, 초기 고분 시대에 존재했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향으로 인한 일본의 변혁은 쇠퇴했다.[1] 한편, 서로 갈등을 빚는 한반도의 국가들은 일본의 중립 또는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외교 사절단을 자주 파견했다;[9] 궁극적으로 이는 일본의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이 증가함에 따라 백제에 가장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10] 많은 장인과 숙련된 기술자들을 포함한 사람들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595년에 일본에 도착한 고구려혜자와 백제의 혜총 두 명의 고승이 포함되었다.[11] 관륵 또한 백제에서 왔으며, 쇼토쿠 태자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일본이 백제와 동맹을 맺자 고구려 승려들은 일본을 떠났다.

600년부터 659년까지 일본은 당나라에 일곱 명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문서를 기반으로 법을 제정하던 다음 32년 동안은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지만 신라에 11명의 사절을 보냈으며, 일본서기에는 덴무 천황지토 천황 재위 기간 동안 신라가 일본에 17번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 시대백제의 지배 계급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야마토 조정은 660–663년에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백제를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백강 전투 참조).

5. 1. 1.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649년에는 신라에서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 공작이 활발해졌다. 645년에 왜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40] 백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41]

하지만 백제와 왜를 갈라놓으려는 신라의 외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는 등의 왜의 내부 사정으로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진 데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42][43] 또한 신라의 급속한 당풍화가 백제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당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4][45]

중국 문화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이 설립되기 전에 한국의 삼국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 사절단 파견은 계속되었지만, 초기 고분 시대에 존재했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향으로 인한 일본의 변혁은 쇠퇴했다.[1] 한편, 서로 갈등을 빚는 한반도의 국가들은 일본의 중립 또는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외교 사절단을 자주 파견했다;[9] 궁극적으로 이는 일본의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이 증가함에 따라 백제에 가장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10]

야마토 시대백제의 지배 계급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야마토 조정은 660–663년에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백제를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백강 전투 참조).

7세기에는 수많은 공식 사절단, 사제, 유학생들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일부는 20년 이상 머물렀고, 귀국한 많은 사람들이 저명한 개혁가가 되었다.

5. 1. 2. 백강 전투와 왜의 접근 (7세기 후반)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신라·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663년, 신라와 당은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백강 전투)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신라의 침략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오노성(大野城, 665년)[46]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47]을 축조-여기에 난민들도 참여하였다-하고 방어 전쟁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왜와 신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48] 이후,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성덕왕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49]로 성덕왕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50]

야마토 시대백제의 지배 계급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야마토는 660–663년에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백제를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백강 전투 참조).

6. 경제 발전

고분 시대에 이어 아스카 시대에도 지방 호족(및 고대 집락)의 지배하에 일본의 농업 생산력 향상, 인구 증대, 일본인의 체격 향상이 이어졌다.

참조

[1] 간행물 Kofun and Asuka Periods, ca. A.D. 250–710 http://lcweb2.loc.go[...] Federal Research Division, Library of Congress 2007-04-06
[2] 간행물 Kamakura and Muromachi Periods, 1185–1573, Economic and Cultural Developments http://lcweb2.loc.go[...] Federal Research Division, Library of Congress 2007-04-06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隋唐使の赴倭とその儀礼問題 台湾大学歴史学系 高明士 http://www.japanolog[...] 2006-09-19
[5] 웹사이트 One hundred years older than supposed?: World Heritage Pagoda http://web-japan.org[...] 2007-04-04
[6] 서적 Sacred Texts and Buried Treasures: Issues on the Historical Archaeology of Ancient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7] 웹사이트 續日本紀 卷第一 文武紀一 http://applepig.idv.[...] 2007-01-11
[8] 웹사이트 『続日本紀』国史大系版 http://www.j-texts.c[...] 2018-05-12
[9] 서적 'Early Samurai: 200–1500 AD' Angus McBride
[10]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on Shotoku Taishi http://www.bookrags.[...]
[12] 서적 たべもの江戸史 新人物往来社
[13] 서적 日本人の食生活 : 飢餓と豊饒の変遷史 Tōkyō : Shibata shoten
[14] 서적 Sacred Texts and Buried Treasures: Issues on the Historical Archaeology of Ancient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5] 웹사이트 Complex of Koguryo Tombs https://whc.unesco.o[...]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16] 백과사전 Tori style http://concise.brita[...] Encyclopædia Britannica
[17] 웹사이트 Asuka Period http://www.mnsu.edu/[...]
[18] 웹사이트 飛鳥時代(アスカジダイ)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5-09
[19] 웹사이트 飛鳥時代|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国史大辞典|ジャパンナレッジ https://japanknowled[...] 2024-05-09
[20] 문서 1999年(平成11年)11月に、大阪市中央区の前期難波宮跡から「秦人国評」の木簡が出土していることから、この頃評制が施行され始めたことは間違いない。
[21]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2] 서적 일본사 파노라마
[23]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4] 서적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25] 서적 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어문학사
[26] 서적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27]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28]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29] 서적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
[30] 문서 1999年(平成11年)11月に、大阪市中央区の前期難波宮跡から「秦人国評」の木簡が出土していることから、この頃評制が施行され始めたことは間違いない。
[31] 서적 삼국사기
[32] 문서 군주가 사망한 뒤 차기 군주가 될 사람이나 선대 군주의 왕비가 즉위하지 않은 상태로 정무를 맡아보는 것. 섭정과 다른 점은 섭정의 경우는 군주로 불리는 존재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칭제의 경우는 그 군주가 없는, 칭제를 맡고 있는 본인이 사실상의 군주나 그에 준하는 존재로서 다만 군주로서의 즉위만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33] 문서 덧붙여 사이메이 천황이 붕어한(661년) 뒤에 나카노오에는 일단은 즉위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국정을 맡았으므로 달력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유년칭원법에 따라 천황의 기년을 표기하고 있기에, 일단은 사이메이 천황 붕어 이듬해(662년)가 덴지 천황의 '원년'에 상당한다.
[34]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35] 서적 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36] 뉴스 백제가 꽃피운 또 하나의 대역사 ‘일본 아스카 문화’ https://news.naver.c[...] 대전일보 2007-10-12
[37] 뉴스 영암 왕인문화축제 6일 개막… 문화행사 풍성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2-04-04
[38]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39]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40] 서적 일본서기
[41] 뉴스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http://h21.hani.co.k[...] 한겨레21 제764호 2009-06-12
[42] 뉴스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http://h21.hani.co.k[...] 한겨레21 제764호 2009-06-12
[43] 문서
[44] 서적 일본서기
[45] 뉴스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http://h21.hani.co.k[...] 한겨레21 제764호 2009-06-12
[46] 서적 일본서기
[47] 서적 일본서기
[48] 뉴스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http://h21.hani.co.k[...] 한겨레21 제764호 2009-06-12
[49] 서적 삼국사기
[50] 뉴스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http://h21.hani.co.k[...] 한겨레신문사 200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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